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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발은 왜 장충동일까요

#슬기로운외식생활 #장충동 #장충동족발 #장충체육관 #족발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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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날 것을 먹던 인간은 불을 발견한 후로 고기와 채소 등을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뇌 크기가 커졌는데요. 이전보다 커진 뇌를 가진 인간은 고차원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듯 음식은 인간의 생명을유지하는 역할뿐 아니라 생활 습관과 사고 방식, 문화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반대로 음식이 인간의 생활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요.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혼자서도 먹을수 있는 1인 메뉴가 늘어난 것이 그 예입니다. 요기요 파트너마케팅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음식과 우리의 삶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여기까지 왔는지 알아보는 슬기로운 외식생활을 연재합니다.



원조를 두고 경쟁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어느 지역을 가도 족발은 있습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족발’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매장만 전국 1만7902곳에 달합니다. 방방곡곡 위치한 수많은 족발 식당을 두고도 우리가 ‘족발!’하면 장충동을 떠올리는 이유는 뭘까요.

슬기로운 외식 생활 여섯 번째 편에서는 야식계 대표주자인 족발, 그중에서도 ‘장충동 족발’의 유래와 현재에 대해 알아봅니다.

 

야들야들한 식감으로 ‘야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족발  |  셔터스톡


진짜 원조는 ‘실향민’ 음식


장충동 족발 골목에 가면 유독 많이 보이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원조’인데요. 족발 앞에 원조가 빠지면 괜히 허전한 기분마저 들죠. 족발 앞에 원조가 붙기 시작한 건 1990년대부터입니다. 수많은 족발 식당들은 소비자 선택을 받기 위해 원조를 내걸었죠. 

수많은 장충동 족발 원조 사이에서도 오래된 업력으로 ‘원조’ 반열에 이름을 올리는 세 곳이 있는데요. ‘평안도 족발’, ‘장충동할머니집’, ‘뚱뚱이할머니집’입니다. 이들 매장에선 1950년대 말부터 족발을 팔았다고 전해집니다. 

세 곳의 공통점을 보면 족발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는데요. 모두 한국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개업한 식당입니다. 1950년대 장충동엔 일본인들이 살다가 남기고 간 집(적산가옥)이 많았는데요. 많은 실향민이 이곳에 정착해 이북 음식점을 세웠습니다. 실향민들이 팔기 시작한 이북 음식은 ‘돼지 족조림’인데요.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서 결혼식·명절 등 중요한 날에 먹는 대표 음식이었습니다. 

실향민들은 돼지 족조림을 이북식 조리법대로 만들지 않고, 조리 과정을 간소화했습니다. 이게 지금의 족발인데요. 돼지 족조림과 족발을 만들 때 들어가는 식자재는 갱엿, 생강, 돼지 족으로 동일합니다. 눈에 띄는 차이점은 한 가지인데요. 돼지 족조림은 장국과 돼지 족을 따로 조리합니다. 이후 삶은 족을 끓는 장국에 넣습니다. 반면 족발의 조리 과정은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장국에 돼지 족을 넣고 졸이는 방식이죠.  

장충동 족발의 성공은 장충체육관 덕분?


1960년대 들어 장충동을 족발의 메카로 만든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장충동 족발 골목의 성행엔 마장동 축산물 시장의 역할이 컸는데요. 1960년대 국내 양돈 산업이 발달하면서 마장동 축산물 시장도 성장했습니다. 돼지 목살이나 삼겹살뿐 아니라 족발, 곱창 같은 부산물을 구하기도 쉬워졌죠. 장충동 족발 골목과 마장동 축산물 시장은 자전거로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데요. 장충동 족발집들은 멀지 않은 마장동에서 신선한 족발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1963년엔 장충체육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체육 시설인 장충체육관에선 프로레슬링, 권투, 농구 등 규모가 큰 스포츠 행사가 열렸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 내용을 보면 ‘주요 행사가 열릴 때마다 체육관 최대 수용 인원인 8000석이 꽉 찼다’고 합니다.


 

1963년 2월 2일 촬영한 장충체육관의 전경  |  국가기록원


장충체육관 출입문에서 장충동 족발 골목 초입까지 걸어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3분 정도입니다. 직선거리로는 161m에 불과한데요. 1970~80년대 장충동을 경험한 세대는 장충체육관의 인기가 장충동 족발 골목을 만들었다고 회상합니다.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관람하고 나온 사람들은 장충동 족발 골목에서 허기진 배를 달랬습니다. 

시원한 술 한 잔을 들이켜고 고기 한 점을 넘기며 누군가는 승리의 기분을 만끽했을 테고, 또 누군가는 패배의 아쉬움을 떨쳐냈겠죠. 그렇게 장충동 족발은 장충체육관과 함께 인기를 누리면서 ‘서민 음식 대표 주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장충동 족발 신화는 앞으로도 계속될까?


실향민이 자리 잡은 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장충동 족발 골목의 모습은 어떨까요. 장충동 족발 골목은 서울의 주요 상권으로 성장했는데요. 서울특별시가 장충동 족발 골목을 포함한 장충동 일대 7만1435㎡를 주요 상권으로 지정할 만큼 상권이 확대됐습니다. 

하지만 최근엔 예전의 위상을 잃었다는 평이 나오는데요. 장충동 족발 골목의 성장을 이끈 족발집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장충동 족발 골목엔 족발집 10여 곳이 성업했습니다. 행정안전부 지방행정 인허가 데이터에 따르면 현재는 6곳만 운영 중인데요. 


 


서울시가 ‘우리마을가게’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통계를 보면 변화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충동 족발 골목 상권을 찾는 사람이 줄고 있는데요. 특정 상권에서 길을 걷고 있는 인구를 측정하는 ‘길 단위 상존인구’란 수치가 있습니다. 장충동 족발 골목 상권의 길 단위 상존인구는 2020년 6월 기준 1㎡당 2만2650명으로 나타났습니다. 작년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26.8% 감소한 수치입니다. 상권 안에 있는 건물에서 거주하거나 일하는 인구를 집계하는 ‘건물 단위 상존인구’도 1㎡당 9만3165명으로 지난해보다 31.2% 줄었습니다.

장충동 족발 골목의 위기는 서서히, 다양한 이유로 찾아왔습니다. 정부는 1975년 잠실에 7만80명을 수용하는 메인 스타디움을 비롯해 2만명을 수용하는 체육관을 세우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79년 잠실체육관이 준공됐는데요.

새로 생긴 잠실체육관은 장충체육관을 대체했습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농구대회, 1988년 서울올림픽 배구대회 결승전 같은 대규모 행사가 잠실체육관에서 열렸습니다. 장충체육관을 찾던 관중들도 자연스레 잠실체육관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경기를 관람하고 장충동 족발집으로 향하던 관중들도 사라졌죠. 

잠실체육관이 2000년대 이전 장충동 족발 골목을 위협한 요인이라면, 최근엔 치솟는 돼지고기 가격이 장충동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은 날마다 삼겹살 가격을 기준으로 돼지고기의 소비자 유통 가격을 발표하는데요. 2020년 1월 2일 1㎏당 1만7262원이던 유통가는 2020년 11월 12일 2만1300원을 기록했습니다. 이제 족발을 ‘서민 음식’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은데요. 세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인 요즘, 이들에게 족발은 약속이나 모임이 아니면 찾기 힘든 음식이 됐습니다. 


참고자료
-서울시 음식거리의 형성배경과 발달과정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7
-음식이 있어 서울살이가 견딜 만했다, 정은숙, 따비
-이북 5도 위원회 공식 홈페이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식 홈페이지
-[테마스토리 서울] 장충동, 서울신문, 2009.09.04.
-[박정배의 Food in the City] 한국 서민 먹여살린 단백질 공급원, 주간동아, 2013.11. 25.
-족발정치, 경북매일신문, 2020.04. 28.
-‘올림픽一年前(일년전) 63年(연)의「스포츠」界(계) ③ 맘모스 體育舘建立(체육관건립), 조선일보, 1963.12.08.
-[에드세상] “따라하지마” 광고 원조전쟁 후끈, 해럴드경제, 2004.10.19.
-蠶室(잠실) 실내체육관 竣工(준공)개관, 동아일보, 1979.04.18.
-잠실競技場(경기장)내년初着工(초착공), 동아일보, 197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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